융의 심리학과 미술에 대한 이론

[09] 내 감정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

나날의 나날-생각의 방 2025. 7. 14. 16:39

🔹 1. 이 감정, 정말 내 감정일까?

“기뻐해야 하는 순간인데, 이상하게 무거워요.”
“상대가 화내니까 나도 무작정 미안해졌어요.”
“그 사람 눈치만 보다 보니, 내가 뭘 느끼는지도 모르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앞의 글들을 읽어오신 분들이라면 이제는 ‘내 감정’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려는 훈련을 시작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무의식 일기를 써보면, 어느 순간 “이게 정말 내 감정이 맞나?”라는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이상합니다. 분명 내가 쓴 감정인데, 며칠 뒤 다시 읽으면 낯설게 느껴지고, 때로는 “내가 이렇게까지 느꼈었나?” 하고 의아해지죠. 그 의심은 점점 확장됩니다.

“나는 감정을 쓴 게 아니라, 감정을 연기한 걸까?”
“지금 느끼는 이 감정도 진짜가 아닐 수 있을까?”

 

이 글은 바로 그 혼란의 정체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 2. 감정을 분리하는 훈련에서 나타나는 ‘감정 해체 현상’

무의식 일기를 쓰는 건 자기 인식의 중요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한 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감정을 기록하고 관찰하다 보면, 그 감정이 너무 분석적이고 해체된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순간들:

 

📌 예시 1 – 감정의 시차 인식

“친구와 저녁을 먹고 돌아와 일기를 썼는데,
그날 나눈 대화들이 자꾸 반복돼 떠올랐다.
처음엔 무덤덤했던 말들이 자꾸 거슬리는 걸 보니,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분명 아무 감정 없이 웃고만 있었다.”

→ 감정은 이미 지나갔고, 일기를 통해 다시 끄집어내야만 보일 만큼 자기와 멀어져 있었다.


📌 예시 2 – 감정의 부조화

“회의 도중에 팀장의 말투가 거슬렸다.
감정일기엔 ‘짜증이 올라왔다’고 썼지만,
그날 회의장에서 나는 오히려 적극적이고 유쾌하게 대했다.
일기 속 ‘나’와 회의장 속 ‘나’는 너무 달랐다.
진짜 나는 누구일까?”

느꼈던 감정과 행동의 괴리가 자각되며, 자기 감정의 진정성 자체가 의심되기 시작한다.


📌 예시 3 – 감정 과장 또는 왜곡에 대한 자책

“어제 일기에서 ‘너무 외로웠다’고 적었는데,
오늘 다시 보니 ‘이 정도 외로움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감정을 과장해서 쓰고 있는 걸까?”

→ 감정의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감정 자체가 가짜로 느껴지고 자기 신뢰가 흔들린다.


이처럼 감정을 바라보는 눈이 생긴 순간, 우리는 동시에 그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이건 자기 인식의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입니다.


🔹 3. 감정 해석의 주체는 ‘나’라는 감각

이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감정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답은 단순하지만 어려운 곳에 있습니다. 진짜 감정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때, 그 자리에서 선택하고 수용한 감정’이라는 점에서 진짜입니다. 그런데 감정일기를 쓰면서 우리가 겪는 불안은 “그 감정을 느낀 내가 진짜인가?”를 묻기 시작한 것이고, 그건 오히려 자기 인식의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갔다는 증거입니다.


🔹 4. 페르소나 필터를 다시 정립하는 시간

감정이 낯설어질 때, 우리는 페르소나 필터를 다시 정비해야 합니다. 감정을 감추는 도구가 아닌, 감정을 해석하고 걸러내는 도구로서의 페르소나를 의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의식일기를 다시 읽으며

“이 감정은 왜 내가 받아들였고, 왜 다른 감정은 거부했는가?”
를 스스로에게 묻는 훈련은
감정 선택의 주도권을 페르소나가 아닌 ‘자기 자각’에게 돌려주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일기를 쓰는 나’와 ‘감정을 겪는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혀가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 5. 마치며 — 이 불안은 자기를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

감정이 낯설어졌다면, 그건 감정과 자아를 분리해서 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감정이 부정확하게 느껴지더라도, 일관되지 않더라도, 그걸 자각하는 지금의 ‘나’는 이전보다 훨씬 ‘자기’에 가까워진 존재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당신은 감정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나의 관계를 묻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인식의 가장 본질적인 출발점입니다.